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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_역사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by 그놈궁댕이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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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 독립한 국가 중에1인당 국민 소득이 ‘14천 달러를 돌파한 나라는 대한민국, 타이완 두 나라에 불과하다.

 

 

 

1. 신흥 국가의 성장 저해 중진국의 함정이란?’

어떤 나라가 일정 수준의 소독을 넘어서지 못하고, 경제가 성장이 주춤하게되거나, 경제 규모가 줄어 두는 것을 (중진국의 함정)이라고 말한다.

신흥 국가는 처음에는 아주 가파른 성장을 보이다 차츰 성장 동력이 둔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중진국의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성장방식의 극적인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신흥 국가는의 발전은 (값싼 노동력, 많은 인력, 값싼 땅값) 일단 모든 게 헐값이고 싸기 때문에 쉽게 외국의 투자를 끌어 올 수 있다. 특히 노동력이 대체로 남아 돌기 때문에 쉽게 투자와 사업을 하기 좋은 구조이다.

 

일단 투자가 완료되어 경제가 활력을 찾기 시작하면 10~20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존의 (값싼 노동력과, 값싼 땅값)이 어느정도 상승하게 된다.

이럴 경우, 특별한 목적 (적어도 좋은 품질)이 없다면, 외국인 입장에서 투자처로 매력이 떨어지며, 결국 자본을 회수해 다른 신흥국에 투자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좋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20년 안에 충분히 브랜드와 기술 경쟁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안중근 선생님

 

 

2. 경제는 성장하지만 빈곤한 국가의 특징.

개발도상국의 낮은 임금이 빈곤한 국가를 만든다.

영국이 산업 혁명을 이뤄 기계혁명을 했던 명확한 이유는 ’높은 임금인근 국가에 비해 7배나 높은 인건비 때문이다.

 

인건비가 비싸니 자연스럽게 혁신을 통해 투입인원을 줄이고, 비효율적인 부분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야만 한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은 토지에 비해 인구는 많고, 임금은 거의 최저 수준을 유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저 인금은 업무의 동기를 축소하고 , 자본이 없기 때문에 적절한 소비 활동도 못한다. 결국 그들은 투자보다 저축에 힘을 쓰고,, 경기는 침채로 이어진다.

 

개발도상국은 경제 시스템이 허약하기 때문에 금리가 높다.

그리고, 노동 임금도 매우 적다.

 

결국 돈이 많은 지주층이나 경제의 주체들은 투자와 개발보다 ’고리대금엄‘ 위주로 경제를 지탱한다. 어차피 일할 싸게 일할 사람이 많기 때문에 혁신도 없다.

 

노동자에게 자본이 넉넉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 자녀들의 교육 수준은 현저히 떨어진다.

 

 

 

 

 

 

 

 

 

3. 해방후 우리나라의 경제 번영의 초석

 

일단 미군정의 역할이 크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절대적 권력을 가진다.

그들이 원한다면 손쉽게 대한민국의 경제를 조절할 수 있다.

 

막강한 절대 권력이 강하게 경제를 통치하는 구조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점진적으로 토지 개혁을 단행한다.

 

일제 시대 직후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 문제가 매우 많았다.

(일본에서 온 지주 , 토착 대지주,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

 

일제 시대 반 강제로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 산업 노동자가 된다.

문제는 일제 패망으로 원료 공급이 끊기고 제조업과 생산업이 중단되었다..

그 결과 많은 도시 사람들이 다시 농촌으로 내려와서 농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리고, 농민들은 ’소작 제도를 시행했고, 농민에게 돌아가는 생산물은 많지 않았다.

그런 불균형으로 인해 농업 전체 생산략은 감소하고, 경기 자체는 침체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은 토지 재분배 정책에 힘을 쓰게 된다.

 

 

 

미군정은 크게 2가지 정책을 핀다.

소작료를 기존의 1/3로 줄여줌 대규모 농지를 농민에게 판매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에서 보유한 대규모의 토지를 농민에게 팔았다.

농민들은 모든 수익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개인 소유의 농지를 갖게 되었고, 모두가 더 열심히 일할 명분이 생겼다.

기존에는 지주들이 농지를 쉽게 팔려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혜택을 받기 힘들었다.

 

 

1948년 초 토지를 농민에게 매각함으로 농업 인구의 24.1%나 해당하는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실제 재미있는 사실은 미군정이 농민에게 토지를 넘긴 이유는 한국사람들이 공산주의자가 될까 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정 토지 개혁을 주도하던 ’울프 라데진스키‘ 발언

나는 1921년 초 러시아를 떠나기전 얻은 교훈 때문에 토지개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 단소하게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절대 권력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공산주의가 자유주의 사회보다 더욱 부유했다.

그런 관점도 있고,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국민들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준비하게 된다.

이때 어느 사회가 더 좋은지에 대한 저항과 타협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군정은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의도로 농민에게 토지를 넘기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참 고운  유관순 누나

 

 

 

4. 토지 개혁의 장점

기존에는 지주들은 저임금 노동력 착취가 가능했으므로 기술 투자와 산업에 혁신을 이끌 필요가 없었다. 지금처럼 노동력을 착취해도 잘 먹고 잘살기 때문이다.

 

반대로 농민들은 관개 시설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지주들이 소작 계약을 연장해 줄지 불안감이 많았다.

토지가 자신의 소유가 됨으로 이런 불안감은 해소된다.

 

토지개혁 이전에 대한민국은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국가‘ 였지만 식량 자급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나라였다. 토지개혁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

해방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육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다른 산업에 참여하기 힘든 구조였다. 아무리 효율이 적더라도 농업에 대다수의 사람이 투입됨으로 기존보다 조금씩은 좋은 형편이 되어 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할 목적과 기술개발에 목표가 생겼으므로 경제는 농업을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1953년 전체 국내총생산에서 농업과 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8%나 되었다.

우리나라 초기에 경제 성장은 전적으로 농업 때문이었다..

 

이후 1960년대 경제가 수출 중심으로 공업화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경제 성장은 더욱 빨라진다. 점점 높아진 소득으로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었으며, 결국 많은 산업의 기초 원동력이 된다.

1944년 조선의 15세이상 인구 무학력 비중은 (80% / 여성 94%)
1955년 조선의 15세이상 인구 무학력 비중은 (50% / 여성 80%)

 

이렇게 결국 선순환 구조로 경제가 개편되기 시작한다.

 

 

 

너무 멋진 윤봉길 의사

 

 

 

5. 수출 제조업의 폭발적 육성 배경

1950년대 농업 중심의 폭발적 경제 성장 이후 우리나라는 제조업 육성이라는 현실적 과제에 직면한다.. 산업이 태동하고 10~20의 시기가 되면 ’’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 우리나라는 절대로 제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다.

 

농업으로 산업 기틀을 잡고, 제조업으로 산업을 성장 견인한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군력을 잡은 이후 제조업을 육성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제조업을 선뜻 나서겠다는 기업은 많지 않았다.

제조업은 언제 이익을 낼지 확신할수 없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무턱대고 제조업을 공략하기 힘들었다.

 

 

박정희는 기업들을 달래기 위해 당근으로 ’저금리‘’ 저금리‘를 제시한다.

1960년 중반 사채금리가 60%나 되었는데, 나라에서 제조 수출 기업에게 대출금리를 6%~8%로 대폭 낮춰 줬다.

만약 기업이 실적을 제대로 못 낸다면 성공한 다른 기업에게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국영 금융시스템을 통해 자본 회수는 물론 파산을 선고했다. 이런 정책은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했던 정책이었다..

 

 

수출 실적만 내면, 시장금리보다 월등이 낮은 저금리로 자금을 장기간 대출해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기업에 대한 금리 차별 때문에 몇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3년 당시에는 사채 업자 중30% 이상의 기업의 주주나 중역 기업인들이었다..

그들은 수출 기업이라며 은행에서 엄청 싸게 대출을 받아 다른 기업에게 대출해주고 엄청난 차익을 착복하게 된다.

 

박정희는 기업이 제대로 수출만 한다면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일단 그의 목표는 제조업 육성이었다..

 

 

 

 

 

 

 

 

6. 아시아 제품이 미국에서 폭발적 판매가 이뤄진 배경.

아이 너리 하게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 때문에 아시아 물건이 미국으로 싸게 넘어가 팔 수 있었다.

 

 

베트남은 남북 길이가 약 1,100킬로가 넘고, 수심이 낮아서 항구로 물건을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그리고 단선 철도 하나만 운영되었다..

거의 불모지에 가까운 베트남에 미국은 많은 전쟁 물자를 보내야 했는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1960년대 초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것은 ’컨테이터선‘ 운송 시스템을 만들게 된다.

일종의 운송 규격을 통일시키게 된다.

이런 운송의 통일성은 물건을 싣고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준다.

 

 

그 당시 미국 해양 수송지원단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7척의 컨테이너 선이 기존의 벌크선 20척 몫을 한다.”

 

 

베트남 깜라인 만으로 전쟁물자를 수송했던 컨테이너선들은 수송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의 고베항에서 전자제품을 싣고 미국으로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아시아 물건이 일본에 붐을 일으키는 발판이 마련된다.

한국의 제조업의 품질이 높아지고 경쟁력이 붙으며 미국의 컨테이너 선들이 한국과 중국의 물건을 미국 본토에 팔아 넘기기 시작한다.

 

 

 

 

 

 

 

7. 느낀점

사실 너무 생각해보면 너무 웃기다.

베트남 전쟁 수송이 힘들어서 컨테이너선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아시아 물건을 싣고 가 미국 본토에 판매되었다는 점과. 미국은 한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토지개혁을 했다는 점이 조금 재미있었다.

 

그리고 모든 산업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노동자가 자본이 있어야 더욱 발전한다는 사실과 개발도상국에선 농업이 산업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한국은 유독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없다.

일본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내가족이 살아왔던 삶의 쾌적을 찾아보는 것은 올바른 마음 가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찾아보면 의외로 역사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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