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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_역사

중앙은행의 시작과 화폐에 관하여

by 그놈궁댕이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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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강하고경제는 허약한 스페인>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후 약 100년간 스페인은 엄청난 행운을 경험한다.

잉카,마야 제국을 약탈한 금과 은이 고갈될 무렵인 1545년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사상최대 규모의 은광이 발견된다.
 광산 한곳에서 채굴된 은의 양은 연간 5만kg에서 28만kg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1546년 9월 8일 스페인과 원주민으로 이뤄진 탐험대가 멕시코 시카테카스에서 풍부한 은맥의 존재를 확인 한다.
1540년 이탈리아 기술자 바노초비링구초가 ‘열기술’이란 논문에서 수은을 이용해 광물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대단히 효율적인 공법을 제시한다. 이로 인해 시에라 모레나 산맥에 있던 알마덴의 풍부한 수은 광산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는 스페인에게 저주가 된다.

 

 

 

 

엄청나게 많은 은과 금은 경제에 엄청난 재난이 되었다.

스페인에 통화량이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문제는 스페인의 생산 능력이 그것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늘어난 통화량으로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한다.

 

자국에서 만든 제품 보다 해외에서 만든 제품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결과 국외로 지속적인 귀금속 유출이 시작된다. 이런 현상을 ‘네덜란드 병’ 이라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축적되는 부는 저주가 된다.

 

 

 

 

<네덜란드 병>
 
네덜란드는 1959년 북해에서 대규모 가스전을 발견한다.
이후 수출로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게 된다.
그런데 수출 대금이 유입되자 네덜란드 화폐가 크게 상승해 1970년대 들어 천연가스 산업을 제외하고 수출 업체들이 해외에서 줄줄이 경쟁력을 잃게 된다.
 
쉽게 말해, 자원이 개발된 후 오히려 해당 국가의 경제 침체가 발생하는 것을 ‘네덜란드 병’ 이라 한다.

 

스페인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거대한 식민지를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물품을 계속 실어 보내야 했다.

식료품은 큰 문제없었지만, 가구나 양탄자,모직물 물품은 수요를 맞추기 어려웠다.

결국 막대한 부는 이런 물품을 해외에서 대거 사야 했고, 대금으로 많은 귀금속이 지출되었다.

 

 

 

<당시 스페인 지식인은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 우리 왕국은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과 은으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이 될 수 있었지만금과 은은 우리의 적들인 다른 왕국으로 보내는 징검다리로 전락한 까닭에 가장 가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현대 경제학 관점에서 보자면..

통화량이 갑작스럽게 늘고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게 발생하는 경우금리를 인상해 경제 전체의 수요를 진정시키는 정책을 펼쳐야만 한다.

 

 

 

문제는 16세기 스페인에는 중앙은행이 없어, 그런 통합적인 금융 정책을 할 수 없었다.

또한, 그 당시 스페인은 대규모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켜 물자를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금리를 최대한 낮추는 방향으로 나라를 운영해야만 했다.

 

또한 많은 생산량을 해야 하는 젊은이 남성들은 전쟁터에 나가야만 했다.

결국 경제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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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스페인은 16-17세기 내내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피사로가 이끄는 200여 명의 원정대가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거의 신화에 가깝다.

또한 약 250명의 병사를 단일 대형으로 만들어 적을 공략하는 ‘테르지시오 방진’으로 무장한 스페인 육군은 세계 최강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전략과 군사력을 갖고 있지만스페인은

전투에서는 이기지만 전쟁에서 패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유럽은 그 당시 용병 제도를 기반으로 했다.

용병은 막대한 비용이 들기도 하며, 충성심이 아닌 돈에 의해 움직였다.

쉽게 말해, 돈이 제대로 융통되지 못하면 바로 말썽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발생한 ‘앤트워프 약탈 사건’은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장기화 전쟁을 통해 1575년 파산했고, 용병의 급료를 제때 지불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용병 부대는 네덜란드에 주둔한 스페인 용병 부대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앤트워프를 약탈해, 7천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 남부 상인과 지식인들은 스페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1년 뒤 1576년 스페인 축출을 위해 극심한 종교 차이를 보인 남부와 북부가 협력하기에 이른 ‘헨트 협약’을 체결해 버린다.

 

 

 

강하고 노련한 군사력보다 중요한 것은안정적인 경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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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사람들이 미친 듯이 금과 은을 찾아 나선 이유>

 

사람들이 처음에 금에 목숨을 걸게 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가 그의 책인 (사피엔스)에서 역설한 내용을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을 깨치면서 화폐를 사용하게 된다.

금은화폐로써 아주 적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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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화폐로써 좋은 점>>

 
1) 매우 잘 늘어난다.
매우 잘 늘어나며 얇고 작게 만들어 거래하기 쉽다.
 
 
2) 보존성이 너무 좋다.
기존의 화폐인 조개류들은 부서지기 쉽다. 금은 오래 보간이 가능하며 녹도 슬지 않는다.
또한, 무른편이지만 주석이나 구리 같은 다른 금속을 통해 단단하게 만들어 주화를 만들기 쉽다.
 
 
3) 사용 가치가 아주 높다.
일본에서는 쌀/ 조선에서는 면포가 일종의 화폐 역할을 했다.
여러 왕족의 무덤을 보면 엄청난 금장식으로 되어 있다.
즉, 높은 계급의 사람일수록 금의 가치를 아주 높게 평가했다.
그결과 소량만 보유해도 금은 충분히 제값 이상을 받을수 있었다.
희소성도 있어 가치가 쉽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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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써 금은 너무 좋았다.

금을 화폐로 사용하려면 금의 보유량을 측량해야 했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보증해야 했다.

이것이 정부가 했던 일이다.

금을 보관하고 증서를 발행한 뒤, 증서의 물량만큼 금을 되돌려 준다는 약속이다.

 

사람들은 무겁고 위험한 실물의 금보다, 증서 형태의 얇은 문서를 선호했다.

또한, 정부에서 그것을 보증하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적었다.

 

 

 

 

 

 

 

 

 

 

 

수요와 공급이 달랐던 유럽과 동방 >

초기 유럽은 동방에 (후추, 비단,도자기)를 구입하기 희망했다.
문제는 동방에서는 (시계)를 제외하고 유럽 상품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실물 거래에선 이것이 문제이지만, 지폐를 통해 거래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가 활발해지게 된다.

 

동방 입장에서 불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필요도 없고, 증서를 통해 다른 물품으로 나중에 교환하면 그만이었다. 필요하면 양도하기도 쉽고, 부피도 적었다.

 

어쨌거나 화폐를 발명으로 유럽과 동방은 자유로운 많은 교역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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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대규모 귀금속이 유입되고, 결국 세계적인 교역망이 형성된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맞춰 상인이 등장한다.

상인은 크게 2가지로 나눠진다.

 

<상인>
지역 경제에서 실물 유통을 담당하는 전통적인 사람들.
<자본가>
16세기 형성된 세계화 경제 체제에 따라 장거리 교역을 주도하던 새로운 사람들.

 

동아시아와 아메리카를 대상으로 이뤄진 원거리 무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활동이 가능한 자유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거리 무역을 희망한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나눠진다.

교회와 국가의 간섭이 없음. 엄청나게 많은 수익성

 

예를 들어 1497~1499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항해에 성공한 포르투갈 항해사 ‘바스코 다가마’는 4척의 배로 떠나 단 2척으로 돌아왔지만, 투자자에게 무려 원금의 60배에 달하는 배당금을 받았다.

 

 

이과정에서 많은 가문들이 자본가 역할을 하게 된다.

상업 대가문들의 주요 거래 대상은 사실 ‘정부‘였다.

정부에게 많은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

 

이런 자금 융통 시 사업과 정치가 긴밀하게 결탁하게 되고, 온갖 특혜를 받게 된다.

이런 풍조와 관행이 지금도 유지되어 오고 있다.

현재도 많은 정치인들이 고액 후원을 받기도 하고, 유망한 은행이 정부에게 돈을 빌려주고 특혜를 받기도 한다.

 

 

 

 

 

 

이탈리아 스트로치곤디 독일 푸거 벨저 이탈리아 피란체 메디치

 

수많은 금융 명문 가문이 있지만, 그중에 ‘메디치‘ 가문은 굉장히 유명하다.

메디치는 특히 ’환어음 중개 업무’를 주로 했다.

 

환어음이란 중세의 치안과 부실한 도로망 때문에 쉽게 교역이나 환전을 할 수 없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발행지 & 수취지)를 다르게 설정했다.

현대의 ‘은행’과 동일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돈은 A에서 빌리고, 채무자가 편하고 가까운 B에서 지불하거나 다시 빌린다.

이런 식의 편리성과 안정성으로 피란체의 상인들은 유럽 전역에 대리인을 통해 물건 값을 치르고, 빚을 갚았다.

 

 

환어음 제도의 장점 >

,은 운반에 드는 비용 위험 감소 무역에 따른 교환 환율 차이로 추가 수익

 

환어음 거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사업에서 신용과 외상 거래가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높다는 점이다.

안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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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어음 거래 파산을 막기 위한 중앙은행 제도>

이런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 중앙 은행’ 개념을 만들어 낸다.

 

160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에서 최초로 중앙은행이 설립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서로 다른 조폐국이 14개나 되었고, 유통되는 통화도 엄청났다.

중앙은행을 만들기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은행’ 은행은 현대적 중앙은행으로 보기 힘들다.

이 은행은 현대처럼 대출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 은행의 목적은 예금이 유입되면 그것을 귀금속으로 100% 가까이 지급이 가능하도록 준비하는 안전장치로써 세워진 은행이었다.

 

금을 교환하는 문서로 화폐를 사용했고, 암스테르담 은행이 확실한 지급이 가능하다는 담보적 또는 상징성을 통해 마음 놓고, 화폐를 사용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준 안전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이후 여러 나라에서 조금씩 개선된 중앙은행을 만들어 설립하게 된다.

스웨덴 정부가 설립한 (릭스방크, 1659년 ) , 영국에서 설립된 (영란은행 , 16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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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금리가 높은 나라는 투자처러 적합하지 않을때가 많다.

 

1) 국민들은 자신의 보유한 자금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낮은 금리에도 만족한다..

2) 금리가 높은 이유는 불안한 금융 시스템 때문에프리미엄이 붙었기 때문이다.

3) 금융 시스템이 취약해 자본 축적이 어려우면 경제가 활발하게 발달할 수 없다.

4) 신흥국은 대체로 금리가 높은데불안한 심리가 작용한다.

5) 금리가 높은 곳에선 작은 문제도 크게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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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개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

역사부터 찾아보고 있는데..

내 머리가 나쁜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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