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_후기

넷플릭스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 논란

by 그놈궁댕이 2022. 6. 26.
반응형

넷플릭스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논란

 

사실 이런 작품이 있는지도 최근에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재미있다고 독특하다고 보고 있는데, 우연히 작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논란은 전혀 가볍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반성과 자기성찰의 의미로 해당 내용을 찾아서 정리해 본다.

 

+ 내용 출처 : https://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7465491
+ 내용 출처 : https://m.ppomppu.co.kr/new/bbs_view.php?id=freeboard&no=7464009

 

원제는 ‘전라감독~ 무라니시 토오루 전’입니다.

일본 성인영화의 대표 감독인 ‘무라나시 토오루’에 관한 자전적 드라마를 2019년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게 됩니다. 현재는 시즌2까지 나와있는 작품입니다.

 

무라니시는 지금까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으로써 알려져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통해 그의 행적을 미화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가볍지 않고 매우 끔찍한 수준의 범법자입니다.

 

더욱이, 대한민국 국민들 입장에서 무라니시는 인간 쓰레기 수준의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일본 성인물 시장의 성장 배경>

일본의 성인 비디오 산업이 발달한 것은 태평양전쟁 패망 이후,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단카이 세대)의 등장과 그로 인한 1980년대 버블경제 심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일본의 성인 비디오 시장 또한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별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과거 극장에서 ‘애마부인’, ‘지옥에서 건진 내 딸’이나 ‘훔친 사과가 맛있다’, ‘먹다버린 능금’과도 같은 성인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었는데 일본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고 수위도 성인영화 등급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에로물들은 대부분 필름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죠.

 

 

 

이를 이른바 '로망 포르노'의 시대라 부릅니다.

 

 

 

그러던 것이 1977년 비디오 시장의 성장을 눈여겨 보던 비닐잡지(일본의 가판대 등에서 판매하는 싸구려 성인잡지) 제작사 쿠키가 캠코더로 이를 촬영해 비디오 대여점을 통해 공급할 경우 대박을 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제작사를 만들고 이를 실행했는데요. 일개 싸구려 잡지 회사가 영상 제작판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쿠키가 바라보고 있던 '야한 동영상'에 몇 가지 특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영세한 제작사가 제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제작비가 가능했다는 점. 당시 쿠키는 로망 포르노나 다른 기타 에로물들과 차별화를 하기 위해 퀄리티는 떨어질지 모를지언정 '본 플레이'만을 담은 영상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배우들의 섭외가 필요 없었고 촬영장소도 많은 필요가 없었으며 스태프들도 간소화 되었습니다. 비닐잡지 제작사였기 때문에 성인 배우들의 섭외는 전문이었던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죠.

 

 

 

촬영의 결과물은 매우 조악했던 수준이었고 퀄리티도 떨어졌지만, 로망 포르노나 에로물과는 달리 ‘플레이 자체’만을 담은 영상이었기 때문에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고 스토리나 이야기의 전개나 촬영 배경 등 감안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제작비는 저렴한 수준이 될 수밖에 없었죠. 로망 포르노에 이어서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라니시 토오루를 위시한 캠코더 촬영 비디오 제작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고, 당시 호쿠토(현 Will, S1, 무디즈 등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 최대 DVD&비디오 유통업체) 산하의 비디오 대여점에 이들 촬영 비디오들이 배포되면서 ‘어덜트 비디오’라는 장르가 창작되고 현재 이는 AV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저렴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즉각적이었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범람했고 당연히 제작물들은 쏟아졌죠. 비닐잡지의 에로 모델을 하다가 AV배우가 된 아이조메 쿄코는 최초의 AV배우라는 수식어를 따냈고 야가미 야스코는 초대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히트였냐면, 당시 비디오 시장의 ‘표준’경쟁을 하던 파나소닉이 아이조메 쿄코를 모델로 해서 비디오 판매 이벤트를 하기도 했었으니까요. 이 과정을 통해 로망 포르노를 비롯한 에로 영화들은 모두 사장되고, AV의 시대가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급진적인 발전에 대해 국가가 나서지 않았는가 하면, 이는 단카이 세대의 등장과 80년대 버블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로망포르노가 등장한 이유는 68세대, 전공투 세대를 위시한 좌파 세대의 대두와 이로 인한 저항정신, 아직 남아 있는 우파 제국주의 성향을 걷어내고자 하는 자유민주진영의 저항정신이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적인 분야에서도 급진적 바람이 일어난 것이었죠. 이는 영화산업의 상업적 이해와 맞물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당시 종신고용과 인공서열을 주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파나소닉이 전자기기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는데 당시의 ‘뜨거운 감자’는 단연 비디오 데크였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산요전기, 소니 등은 파나소닉과 함께 비디오 데크에 대한 표준 시장에서 경쟁을 벌였고 이는 각 가정에 비디오데크 하나정도는 들어가게 되는 폭발적인 보급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비디오 산업 혁명은 당시 성장하던 일본 경제에 큰 힘이 되죠.

 

 

 

한편, 이러한 흐름에 이전에는 없던 과격한 성인 에로 콘텐츠가 개입되고 있다는 것을 정부 또한 알고 있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규제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우라 비디오라는, 형식상의 심의를 무시하는 비디오들까지 유통되고 있었지만, 1980년에 들어서 일본 경제를 세계 2위까지 끌어올린 버블경제 시대를 맞이하면서 돈이 되는 산업에 칼날을 들이댈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특히 이 때에는 유럽, 미국 등 세계 시장으로까지 일본 가전이 부각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내수시장에서의 성장세를 억제하는 정책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태평양전쟁 이후 각 가정이 울며겨자먹기로 보유하고 있던 쇠구슬 베어링(당시 일본은 볼트나 베어링 등 군수물자의 어느 정도를 각 가정에 할당해 납품토록 했음)을 쓸데가 없었는데 그것이 빠찡코 가게들의 줄창업으로 이어졌고 경제가 어렵다 보니 붐을 일으키던 빠찡코를 애써 외면한 일본 정부의 이면적 모습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일본은 도박이 불법인 반면 빠찡코는 합법입니다).

 

 

 

물론 규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써도 규제는 '자체적으로 검열을 해야 한다'라고만 명문화 되어 있고, 암묵적으로 이 자체 검열은 자체적인 모자이크 처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비디오 산업의 부흥을 이끌고 콘텐츠 산업의 한 축으로 성장한 업계를 더 이상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흐름이 일본 최대 비디오 콘텐츠 공룡인 호쿠도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고, 일본 자동차 산업의 30%수준까지 올라오는 대형 매출 시장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유교적인 관점이나 나라 특유의 성향과는 별개로, 과도성장기에 있었던 나라의 사정과 패망 이후 자연스럽게 등장한 전체주의 저항세력의 대두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요.

 

 

 

 

 

 

 

 

<무라니시의 혐한 발언>

그는 혐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을 증오하며 ‘위안부는 창녀’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 쓰레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품은 무라니시를 상당부분 미화 되었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이 어면히 다르다고 하지만,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넘어갈수 없다고 봅니다.

 

 

 

 

 

<무라니시와 일본 성인물 시장>

1980년대 들어서 본격적인 AV시대가 개막되었던 시기, 아직 많은 것들이 미흡하고 제도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업계는 아직 혼란한 시기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에야 톱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배우들을 대우하고 준 연예인 취급을 하는 등, 셀럽으로 대접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창녀, 창부 취급과 다름이 없었죠. 괜히 바키 사건을 일으킨 주범 쿠리야마 류가 법원에서 “저것들은 그냥 창녀에 불과하다!”라고 외친 게 아닙니다. 인식은 박하디 박할 수밖에 없던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대우는 불가축 천민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고 배우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비디오 데크가 폭발적으로 보급하면서 (극장의 영화 시장, 비디오의 성인물 시장)이 서로 타협하고 분리되었습니다.

 

또한,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제작이 쉬운 비디오 시장의 특징과 비디오 데크 보급 과도기라는 점에서 영세하고 작은 업체들도 단순하고 자극적인 작품을 양산해 내기 이릅니다.

 

 

 

지금에야 배우의 데뷔작에서 각종 인터뷰를 하고 배우의 매력을 알아보는 다각면의 촬영을 진행하지만, 당시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나와서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XX를 하는 씬이 전부였습니다. 대사나 컨셉 등은 사치에 불과했죠. 이름을 대고 인사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인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해본적도 없었던 업계의 탄생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시작하는 사람', '오피니언 리더'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 혼돈의 시기에 등장한 무라니시 토오루는 여배우를 섭외하는 방법에 비 인간적인 방법을 자행하며 강제적인 출연을 종용하고 출연한 배우에게 강호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사기꾼이었습니다.

 

 

 

 

 

<무라니시가 여배우를 섭외했던 방식>

1. AV에 출연할 경우 팔릴 것 같은 여배우에게 컨택한 뒤
2. 촬영 후 계약금으로 거금을 약속하고
3. 촬영 사실을 대부분 숨긴 뒤(섹시한 사진 몇 장 찍으면 끝난다는 등의 종용)
4. 촬영 장소에 가서 반 협박에 가까운 강요를 한 뒤
5. 약속된 계약금을 주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여배우들은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AV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탕발림에 속아서 따라나선 경우도 많았으며, 계약서라고 내민 깨알 같은 조항들이 있는 종이에는 사실 이상한 소리만 잔뜩 적혀 있고 ‘합의된 촬영을 일방적으로 거부할 경우 수배의 위약금을 지불한다’라는 조항은 발견하기 어렵도록 했죠.

 

성추행에 강간은 예사였고 전말을 알게 된 배우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감금시킨 뒤 촬영한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취급을 받아도 법적으로 구조를 바란다거나, 혹은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시기였기 때문에 무라니시 토오루는 이런 점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기에 가까운 출연강요를 해도 자신은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이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서는 업계가 탄생하는 데에 매우 정의롭고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무라니시 대표적 문제>

여배우 강제 출연 논란 여배우, 직원 임금 미지급 논란

 

무라니시 토오루는 현역 당시 출연 강요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배우가 도망가지 못하게 촬영을 멀리가거나, 제대로 촬영을 소개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선 미타무로 코스케 라는 가명으로 나온 ‘히비노 마사아키’ 인터뷰 내용.

히비노 마사아키는 무라니시의 조감독 출신이다.

대부분 AV촬영은 하루에서 이틀 많으면 사흘에 걸쳐 찍는다.
그런데 당시 크리스털 영상에서는 5~10명 정도의 여자가 규슈와 훗카이도에 데려 가고 한번에 몇 개의 작품을 촬영하는게 보통이였다. 이렇게 멀리 갔던 이유는 여자를 속이고, 여자가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배우들이 성인물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하면, 말했지만 당신이 제대로 듣지 않았을 뿐이다. 라고 했다.

 

 


그는 여배우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경찰을 매수하며 직원 폭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특히 드라마 초반에 나오코라는 가명으로 나온 배우 사건이다.

실제 그녀 이름은 히미코 였고, 그는 3천만엔을 들고 도망친 사건이 있다.

당시 히미코의 개런티를 자신이 관리 해주겠다던 무라니시의 말에 속아 단한푼도 돈을 받지 못했다. 설상 가상으로 다이아몬드 무수정 유출사건을 통해서 비디오가 유출되며 성인 배우로써 활동에 큰 타격을 받는다. 결국 히미코가 가지고 나온 3천만 엔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조감독 히비노 마사아키가 대신 지급해주었고, 히미코는 은행원과 결혼으로 은퇴했다고 한다.

 

 

 

 

 

 

 

 

<드라마에 미화된 대표적 3가지 사례>

첫번째는 이 사람이 미성년자의 출연 이슈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고 정의롭게 발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무라니시 토오루는 전과 7범으로 그 중 대부분이 ‘직업안정법, 아동복지법 위반’혐의입니다. 즉 미성년자를 출연시켰다가 걸린 사건들로 1986년, 1988년 등 17세 소녀를 출연시킨 혐의로 체포되었고 86년에는 하와이에서 촬영을 하다가 FBI에게 체포되어 징역 370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여권법 위반을 한 이유는 이전 범죄 사실이 미국령 비자와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는 종류이기 때문이었으며 FBI가 그를 주시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죠.

 

 

 

==

두 번째는 하와이 로케가 마치 자신의 숭고한 제작자의 꿈인 것처럼 거창하게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실상은 여배우에게 하와이나 유럽 등 아름다운 곳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것처럼 속이고 ‘너도 해외여행 가면 좋지 않느냐’라는 말로 꼬득인 뒤 현지에 가서 강제 촬영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막상 도착한 뒤 현장에서 촬영에 대해 알려주고 도망칠 수 없도록 한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가 안노 루리라는 배우가 출연한 작품으로, 이런 작품들의 경우 대부분 여배우들이 울상을 짓고 있거나 울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그는 뻔뻔하게 ‘부끄러워 하거나 첫 경험에 감격에 겨운 반응’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의 유행어인 ‘나이스데스요’나 고져스데스네’는 이런 배우들의 반응이 필름에 담기자 이상해질 수 있는 작품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에 불과합니다.

 

 

 

이런 그의 사기꾼 행각은 무라니시 토오루라는 인간을 AV계의 거장으로 만들었던 작품 ‘SM스러운게 좋아’에서 출연한 구로키 카오루 등에 의해 폭로된 바 있었고, 무라니시 토오루의 연인이었던 카오루는 그의 잦은 폭행과 협박, 강간에 가까운 섹스성향으로 인해 결별을 결심했지만, 은퇴와 결별 이후 무라니시 토오루는 그녀의 누드사진과 94년 5월 호텔 베란다에서 사고로 떨어진 그녀의 이야기를 무단으로 배포한 뒤 돈을 버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고 이 또한 카오루의 소송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무라니시 토오루가 독립해 만든 메이커인 다이아몬드 영상에서 처음으로 AV를 찍었던 히미코는 약속된 출연료 3000만엔을 끝까지 받지 못했죠.

 

 

 

==

셋째로 ‘쿠로키 카우루’ 소송 사건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쿠로키 카오루는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에서 사라지고 은퇴를 했지만, 드라마는 그녀의 허락없이 본명으로 그녀를 등장시켰다는 점입니다.

 

2004년 당시 모 주간지에서 무라니시 토우루를 인터뷰하며 쿠로키 카오루 근황 가족에 대한 개인 정보를 공개하며 현역시절 당시 누드화보와 작품등의 사진을 공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크게 분노한 쿠로키 카우로는 초상권과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고 소송에 나섰고 결국 승소 했습니다. 2006년 도쿄법원은 주간지 잡지사에게 220만엔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령하게 됩니다.

 

 

 

 

 

또한 아이돌 우에하라 미유는 무라니시 토오루를 블로그에 자신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트린 죄로 고소하며, 무라니시는 벌금형에 처해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우에하라 미유는 당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0명의 형제와 꿋꿋히 자란 소녀 였습니다.

그녀는 그라비아 아이돌로 활동했고, 독특한 캐릭터로써 캔디 아이돌 이란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2010년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하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무라니시의 범죄는 단순하지 않다.>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에 파렴치한 범죄자인 무라니시 토오루라는 인간의 이런 행위가 비단 절대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 인간으로 인해 AV업계는 아직까지 페미니스트 등 존재를 반대하는 인간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배우의 협박에 의한 강제출연, 부당계약 등은 여전히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AV업계가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번지고 있죠. 앞서 언급했다시피 업계가 자리를 잡기 전, 바로미터가 되어야 할 인간이 쓰레기였던 탓에 업계는 십수년 동안 이런 행태가 마치 관행처럼 이어졌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업계는 자행되었던 범죄적 부분을 스스로 도려내는 한편 강제출연을 방지하고 배우들의 인권 문제를 비화시키지 않기 위해 지적재산진흥원과의 협약을 통해 IPPA라는 인증 마크를 도입하거나 철저한 동의 계약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자정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정작 이런 짓을 시작한 인간은 뒤로 쏙 빠져 자신이 위대한 사람인 양 행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혹자는 ‘여배우의 강간과 추행도 모자를 정도의 출연 강요, 사기, 그리고 거짓말로 돈벌이를 한 파렴치한으로 인해 인식 개선과 업계의 자정 능력이 생기기까지 수십년이 걸렸으며 그로 인해 바키와 관서원교라는 희대의 괴물을 만들었다’라고 칭했습니다. ‘저 여자들은 창녀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심은 사람이 바로 무라니시 토오루라는 것.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죠.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