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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_이론

멀티플렉스의 역사와 사회에 끼친 영향들

by 그놈궁댕이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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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의 역사와 사회에 끼친 영향들

 

영화 경쟁력의 가장 근본은 영화 자체이다.

영화의 기본 품질과 퀄리티가 좋으면 배급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원론적 이야기를 떠나서, 영화 산업에서 배급은 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내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영화 배급에 중요 요소들

개봉될 시기 개봉 규모 마케팅 방식 개봉 지역

 

모든 나라가 그렇지만, 배급은 영화 산업에 절대적 힘을 상징한다.

한때 미국에서 논란이 있던 ‘파라마운트 사건’은 배급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나의 회사가 직접 (제작. 배급) 하는 방식을 ‘수직 통합‘이라하며 이때 문제점은 독과점을 떠나서 영화의 질 보다 오직 배급 수익만이 중요 요소가 된다.

 

1948년 뉴욕 법원은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파라마운트가 ’제작,배급‘을 직접 진행하는 것을 상거래상 불법으로 정의하고, 극장 체인을 해체하라고 명령한다.. 이 판결 때문에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도 법적으로 직접 극장 체인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로써 영화를 단지 공장에서 찍어내던 방식의 생산이 끝이 난다.

그러면서 서부극이나 뮤지컬 같은 고전 블록버스터 작품의 위기가 찾아온다.

 

이때부터 할리우드의 메이져 영화사들은 해외 시장에 본격적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헐리웃 영화는 여러 나라에 직접 배급을 시작하며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직배를 통해 미국 상업 영화의 성격이 조금씩 변화된다.

 

 

 

 

 

 

 

 

 

1940년대 이후로 작품의 스타일과 성질이 바뀌게 된다.

이전 -> 이국적 요소를 넣어 미국 관객 위주. 이후 -> 다양한 문화권이 공유 가능한 보편적 내용 위주.

 

이전엔 미국 국민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미국민의 흥미 위주였다.

하지만 여러 나라에 먹히는 소재를 찾다 보니, 보편적인 (사랑, 가족애, 복수)같은 평범한 주제를 자주 사용하게 된다.

이로써 영화 참신하고 독창적인 영화의 발전은 더뎌진다.

전세계를 상대하려면 쉽게 히해되고, 편하적 논란이 없어만 했다.

 

그유명한 마블의 작품들도 따지고 보면,  참신함 보단 평범하고 단순한 스토리를 갖는건 그런 이유라 생각 된다. 

 

 

 

 

 

 

 

 

 

 

 

 

 

 

 

 

 

 

한국의 멀티 플랙스

한국의 경우 1998년 강변역 테크노마트 (CGV강변1)이라는 CJ E&M의 전신인 제일 제당과 홍콩 골든 하베스트와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가 합작한 멀티 플렉스가 최초 생성된다.

제일 제당 홍콩 골든 하베스트 호주 빌리지 로드쇼

 

 

최초의 멀티플렉스가 성공하면서 한국은 ’메가박스 & 롯데시네마‘등의 멀티플렉스 체인화가 급격하게 시작한다.

멀티플렉스는 단순히 극장이 아닌 다양한 쇼핑과 복합적인 문화를 함께 할수 있는 종합 쇼핑몰 형태를 취한다.

한국의 천만 관객 신화는 멀티플랙스 극장의 도입이 절대적이다.

 

기존엔 단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고,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여러 극장을 전전해야 했지만, 이젠 하나의 극장에서 다양한 작품이 상영되며 동시에 식사와 쇼핑도 가능해졌다.

 

 

 

 

 

 

 

 

 

 

 

 

 

 

 

 

 

멀티플렉스의 시초와 역사

 

1) 2개 이상의 스크린 상영 시초

2개 이상의 스크린을 가진 극장 의, 시작은 1937년 ’제임스 에드워드‘라는 극장업자를 통해 이뤄진다.

그는 900석 규모의 엘리베머 시어티 근처에 별관격인 엘러베머 어넥스를 두었다.

같은 건물에 2개의 스크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곳을 멀티플렉스의 시초로 본다.

‘제임스 에드워드‘는 2개의 스크린에 동일한 영화를 상영했다.

이곳은 1980년대 지진으로 붕괴되어 버린다.

 

 

 

 

 

 

 

2) 2개 이상의 다른 영화 상영 시초

1947년 ’넷 테일러‘는 캐나다의 오와타에 ’엘진 시어터’를 운영했다.

극장 옆에 리틀엘진 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극장을 만들었다.

기존의 제임스 에드워드가 만든 것과 별반 다른 점은 없지만, 넷 테일러는 1957년부터 다른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엄청나게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후 1962년 몬트리올에 ‘플레이스 빌 마리’를 열었고, 1964년 토론토에 ‘요크레일 플라자’를 열었다.

 

 

 

 

 

 

 

3) 종합 문화 공간의 멀티플렉스 시초

AMC를 설립한 ‘ 스탠리 더 우드’는 현재 멀티플렉스의 개념인 극장과 쇼핑몰을 통합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1963년 캔자스 시티에 ‘파크웨이 트윈’을 열었다.

그는 극장의 한켠에 쇼핑몰을 함께 운영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2개였던 상영관이 1966년에 4개로 늘리고, 1969년에는 6개로 늘었다.

이렇게 멀티플렉스의 화려한 시작이 이뤄진다.

 

 

 

 

 

 

 

멀티플렉스가 사회에 끼친 영향

 

1) 도시 근교의 산업화 이바지

쇼핑몰과 통합된 대형 극장이 도시 이외에 지어지면서, 해당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준다.

사람들을 외곽으로 분산시키며 도심의 혼잡도가 다소 줄어든다.

 

 

 

 

 

2) 블록버스터 영화 등장.

초기 블록버스트를 대표하는 (죠스 : 1975년작) , ( 스타워즈 : 1977년작)의 시작은 멀티플렉스가 대유행을 하는 시점과 유사하다.

극장 관객을 대형으로 빠르게 유입시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며, 엄청난 흥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3) 멀티플렉스 악영향.

흥행의 대박은 멀티플렉스의 절대적 지원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첫 주에 많은 상영관 확보에 사활을 걸며, 마케팅 비용이 천문학적인 액수로 상승하게 된다.

문제는 작품의 퀄리티보다 마케팅에만 열을 올렸다는 점이다.

 

화려한 볼거리를 억지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조약 한 특수효과와 품질이 떨어지는 SF영화들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이들 영화는 제작 비용이 급상승 한다.

참신한 신작을 만들기보단, 흥행이 확실한 블록버스터의 시리즈작 위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메이크 작품을 더 많이 제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의 본질인 다양성과 퀄리티는 이윤의 극대화라는 목적으로 변질되며, 영화를 성숙한 하나의 문화 예술이 아닌, 단순한 오락 수준으로 위상이 심각하게 격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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