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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_사회_정치

국가가 국민을 잔혹하게 학살한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

by 그놈궁댕이 2022.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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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국민을 잔혹하게 학살한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




나는 오멸 감독님의 ‘지슬’이라는 영화를 통해 제주 43 사건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몇 년간 인천에서 직장에 다녔었는데, 독특한 사회 비평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근 후 인천 CGV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섬뜩하고 치열하고 가슴아픈 제주 43 사건을 알게 된다.










<제주 43 사건의 계기>

1947년 3월 1일 제주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이 난항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자주독립을 촉구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은 제주북초등학교 근처에서 31절 기념 대회를 개최한다.


당시 관덕정 앞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에 치여 다치게 된다.
기마경찰이 이를 알고도, 그냥 가려는 것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쫓아가게 된다.
이것을 시위대의 경찰서 습격으로 생각한 경찰은 민간인에게 발포를 지시한다..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산을 입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제주 시민들은 극도의 분노를 느낀다.



이것을 계기로 1947년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95%에 달하는 제주의 민+관 166개 기간과 단체가 파업에 동참하며 대규모 총파업이 진행된다.





한편, 미군정은 (재조선미 육군사령부 군정청)을 파견하여 진상 조사를 진행한다.

당시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는

"310 총파업에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 있는 좌익 분자들의 거점"

이라고 보고 한다.





미군과 대한민국 정부는 경찰 발포에 대한 과오를 추궁하며 민심을 수습하려 하지 않고, 기회를 노려 좌익세력 척결이라는 목표를 갖고 정책을 전개한다..


조사단이 떠나고 제주도는 (붉은 섬)으로 지명된다.
즉, 제주도는 빨갱이 사냥을 명분으로 민간인 대학살이 자행되고 무고한 국민들의 붉은 피로 얼룩 진다.

희생자 수는 무려 1만 5천 여명에 이른다.












<제주 43 사건의 정의 [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상자 명예회복 위원회]>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 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

2003년 10월 31일 진상조사위원회 의견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2021년 2월 26일에서야 ‘제주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국가 불법행위 책임이 명시되고 4343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현실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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