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핵실험 금지, 핵무기 감축 흐름의 역사
1954년 비키니 사건을 계기로 핵 실험 금지 운동이 시작되어 이듬해인 1955년 (제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가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되기 이른다. 이 운동을 계기로 핵무기 철폐에 대한 인식과 전세계 국제 여론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여론이 NPT 재검토회의와 NPDI(핵 비확산 · 군축 이니셔티브) 회의로 이어지며 국제 사회의 강력한 평화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핵보유국들은 한편으로는 핵억지론에 근거해 핵무기를 증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국제 여론에 밀려 핵 군축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국제적인 핵실험 금지와 핵무기 감축 운동과 정의
1963년 PTBT (미국 · 소련 · 영국)
지하를 뺀 대기권 내 · 우주공간 • 수중에서의 핵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
기술력이 낮은 나라에서의 핵 개발을 억제하는 효과는 있다.
하지만, 앞서 보유한 핵무기를 독점 하려는 3나라의 부정한 의도가 핵심이다.
1970년 NPT(미국 · 소련 ·영국·프랑스·중국)
핵보유 5개국에 '성실히 핵 군축 교섭을 진행할 의무' 부과.
그 밖의 비핵보유국에는 '핵무기 제조 · 취득 금지'와 'IAEA에 의한 보장 조치(사찰) 수용의
무'를 부과.
애초 25년이라는 기한이 설정되어 있었으나, 1995년 재검토회의에서 무기한 연장됐다.
1972년 제1차 전략무기 제한 협정(SALT I, 미국 소련)
탄도미사일 수의 제한을 용인했을 뿐, 핵탄두 수는 언급하지 않음.
아울러 ABM (요격미사일) 조약을 체결해, 요격용 미사일 기지를 제한.
1987년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미국·소련)
사정거리 500킬로미터부터 5500킬로미터까지의 요격.
순항미사일 전량 폐기를 위한 조약.
1991년 제1차 전략무기 감축 협정(START 1. 미국 소련)
미국과 소련이 각각 전략 핵탄두에 6천 발, ICBM· SLBM·전략폭격기 등 수송수단 1600기, 그리고 탄도미
사일의 핵탄두 수에 다시 4900발이라는 제한 설정한 군축조약.
아울러 2009년 그효력을 잃었다.
1993년 제2차 전략무기 제한 협정(SALT I, 미국·러시아)
미국과 러시아 양국의 핵탄두 수를 3000~3500개 이내로 감축하려던 조약.
양국의 사정으로 비준이 이루어 지지는 못하게 된다.
1995년 NPT 무기한 연장
1996년 포괄적 핵 실험 금지조약(CTBT, 전체 UN 회원국)
우주공간, 대기권, 수중, 지하에서의 핵 실험 . 핵폭발 금지하는 조약.
IAEA에 가입된 원자력 보유 44개국 이상의 서명과 비준이 있어야 공식 발효.
현재 (미국,이란, 이집트, 이스라엘, 중국)이 서명만 한 채 비준은 하지 않았고, (북한, 인도, 파키스탄)은 서명도 하지 않아 공식 발효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2000년 NPT 재검토회의
1995년부터 5년마다 열리는 회의.
'핵보유국에 의한명확한 핵 감축 약속'을 포함.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 프라하 연설
유일한 핵무기 사용 국가인 미국이 선두에서 '핵 없는 세계'를 향해 국제 사회를 움직이겠다는 결의를 표명.
2010년 NPT 운용 검토회의
핵 군축, 핵 비확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구체적 행동 계획을 설정 · 합의하고 NPDI를 발족.
2010년 NPDI(일본, 호주 등 12개국)
12개국 외무장관회의를 통해 핵 군축ㆍ비확산의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인 제안을 도출.
이후에 매년 외무장관 회의가 열리며 작업 문서를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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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는 아주 오랜시간 동안 조금씩 핵무기 개발에 대한 억제와 우려를 통해 지속적으로 폐기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핵 이라는게 워낙 강력하기도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선진국 몇몇의 과도한 핵보유 문제로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추세다. 하지만 핵전쟁이 인류를 멸망까지 시킬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끝났지만, 현재 인류는 1만 7천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은 자국의 위험을 감지하거나 불리한 상황에 입각하면 언제든지 핵무기에 대한 위협을 진행했다.
미국이 실시한 대표적 핵무기 위협
<1950년 한국전쟁 >
열세였던 UN군이 잠깐 한반도 남부까지 밀렸던 시기다.
이때, 미군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사용하려 했었다.
맥아더 장군이 특히 핵무기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맥아더 장군이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란 점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한반도를 핵무기로 파괴하려 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625 전쟁 당시 한반도에 핵무기를 4차례 사용하려 했다고 한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사태>
일명 쿠바사태로 알려진 때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흐루시초프가 이끌던 소련군이 근거리 미사일의 쿠바 국내 도입을 시도한다.
이때 케네디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며 철거를 압박했다.
<1968년 2월 베트남 전투>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케산 전투' 에서 당시 미군은 남베트남군이 건설한 케산 기지를 북베트남군이 다시 공격해 빼앗으려는 과정의 전투를 말한다. 당시 수세에 몰린 미군은 국지적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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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미국은 1956년 10월 수에즈 위기, 1958년 8월 타이완 해협위기, 1979년 11월 벌어진 이란 위기...
자국의 위기와 체면이 갂였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언제나 핵공격 위협을 했다.
실제로 공격을 하지 않았지만, 핵공격에 대한 위협은 국제적으로 용인될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고 핵무기를 억제하자고 하면서도 미국 스스로 핵무기를 전세계의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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